「탕부 하나님」을 읽고, 이종묵 장로
2020-09-08 10:16:54
이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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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부 하나님」을 읽고

 

이종묵 장로

 

먼저 탕부 하나님이란 말에 어리둥절하여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탕자(蕩子; 방탕한 남자), 탕부(蕩婦; 방탕한 여자)는 있어도 탕부(蕩父)란 단어는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탕부(蕩父) 하나님이란, 아들들을 위해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사랑을 탕진하시는 하나님이란 의미임을 새삼 깨닫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며 진정 감사하였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둘째 아들(탕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째는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고, 둘째는 잃어버린 맏아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말한다. 보통 유산의 분배는 아버지의 사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반응은 아들의 요청보다 더 충격적으로, 아들을 혼낸 뒤 집안에서 내쫓기는커녕 타산하지 않고 오직 아들을 사랑하여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며 더욱 깨닫고 감사드린다.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자기 신세가 말 그대로 돼지와 같아지자 그는 스스로 돌이켜 자신이 지은 죄를 자인하고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염치불구하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때 둘째 아들이 오는 모습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체면불구하고 측은히 여겨 아들에게 달려가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둘째 아들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자백한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하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 축하연을 열어 먹고 즐기자고 한다. 이 내용에서 나는 하나님의 은총은 어떤 공로나 뼈저린 참회로 얻어낼 수 없고,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수용은 값없이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시는 선물임을 깨닫고 또 감사드린다.

 

둘째로 맏아들은 밭에 있다 돌아와 종들에게서 동생이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동생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그 신분을 회복해주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격노하며 그 잔치에 들어가고자 아니하였다. 아버지가 나와서 잔치에 들어가자고 권하여도 한사코 거부한다. 형이 격노한 이유는 특히 이 모든 일에 뒤따를 손해 때문인데, 그는 속이 뒤집혔다. 형은 아버지에게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혼자 일방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까?”라고 무례하게 항변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놀랍도록 자애롭게 맏아들도 잔치에 동참할 것을 권하신다. 아버지는 네 동생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너도 버릴 마음이 없다고 하시며 내 말대로 자존심을 버리고 잔치에 들어오라고 하신다. 형과 동생이 아버지와 멀어져 있기는 둘 다 똑같다. 둘 다 아버지의 권위를 못마땅해 하며 거기서 벗어나려 했다. 둘 다 아버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위치에 서려고 했고 반항했다. 둘 다 아버지의 마음을 멀리 떠난 잃어버린 아들이었고, 두 아들 중 누구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둘 다 아버지를 이용해 이기적인 목표를 이루려 했을 뿐이지 아버지를 사랑하고 섬긴 것이 아니다. 방식만 다를 뿐 둘 다 자기 마음 속에 집착하고 있는 목표물을 얻기 위하여 아버지를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줄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재물이라고 믿고 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참으로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그냥 잔치에 들어가면 된다. 그러나 아버지가 동생의 신분을 회복시키자 자기유산의 지분이 줄어든다고 생각한 형은 갖은 수를 서서 아버지께 반항한다.

 

예수님은 도덕적인 착한 사람들과 부도덕한 나쁜 사람들로 가르지 않으신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과 사람들을 이용해 스스로 권력과 통제력을 거머쥐려 애쓴다. 방법만 다를 뿐 두 아들 모두 틀렸는데 아버지는 둘 다 소중히 여겨 사랑의 잔치 속으로 불러드리신다. 맏아들도 둘째 못지않게 잃어버린 존재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었다. 동생의 잃어버려진 상태는 무절제하고 어리석은 방종행위 때문인데, 친구와 돈과 자원이 바닥났다. 삶이 온전히 무너졌다. 마침내 동생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깨닫고 돌아가 삶을 재건하려 한다.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는 동생의 경우 못지않게 세상을 불행과 불화에 빠뜨린다. 형은 화가 났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형의 상태도 그 동생의 상태 못지않게 잘못되고 해로운 것임을 드러내신다. 동생은 자신이 아버지와 멀어져 있음을 알았으나 형은 몰랐다. 그래서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는 매우 위험하다. 형은 하나님께 가서 자신의 상태를 치유해 달라고 구한 일이 없다. 자신의 상태에서 아무런 문제도 보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두 아들을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먼저 나가 사랑을 표현한다. 아버지는 저만치 오고 있는 둘째 아들을 대문간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달려가서 입을 맞춘다. 둘째 아들의 회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유발한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아버지의 아낌없는 애정 덕분에 아들이 참회를 표현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아버지는 분노와 원망을 품은 맏아들에게도 나가서 잔치에 들어오라고 다독인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일 적들을 사랑으로 타이르신다. 바리새인을 대하실 때 바리새인과 같이 안하시고, 자칭 의인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방탕하게 살아가는 자유분방한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종교적인 사람들도 사랑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 모두를 죄와 악과 죽음 자체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두 탕자의 이야기는 귀향의 잔치로 끝난다. 우리는 집에 갈 것이고 그러면 아버지가 사랑으로 맞이해 끌어안으시고 우리를 잔치에 들이실 것이다. 이 잔치는 역사의 종말에 벌어질 하나님의 대축제를 상징한다. 예수님의 구원은 잔치다. 그래서 그분이 이루신 일을 믿고 그 안에 안식하면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실제로 거하신다. 그 동안 나는 둘째 아들 탕자와 같이 살지 않았으니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첫째 아들과 같이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이 순종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 유익을 먼저 추구하며 살고 있지 않은지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며 아낌없이 사랑을 탕진하시는 탕부(蕩父)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감사드린다.

 

서기 2020.8.30.

이종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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